대한문 수문장 교대식
대한문은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선조가 의주까지 피난갔다가 서울로 돌아왔을 당시, 궁궐이 모두 불타버려서 거처할 왕궁이 없어서 왕족의 집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완전했던 월산대군가를 행궁으로 삼아 거처하게 된 것이 덕수궁의 시초다.
1611년(광해군 3)에는 이 행궁을 ‘경운궁(慶運宮)’ 이라 하였다. 경운궁의 정문은 원래 정남쪽의 인화문(仁化門)이었으나, 다시 지으면서 동쪽에 있던 대안문을 수리하고 이름도 대한문(大漢門)으로 고쳐 정문으로 삼았다. 정면 2칸, 측면 2칸의 다포식 우진각지붕(네 추녀마루가 동마루에 몰려 붙은 지붕)의 건물이다.
조선왕조에서 제정한 수문장 제도의 첫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예종 1년에 등장한다. 건국 이후 조선왕조 궁궐문의 방비는 궁궐을 수비하는 호군(護軍)이 순번에 따라 돌아가며 지켰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예종 대 남이의 역모사건 등 표면적으로 왕권이 위협받는 사건이 일어나자 궁궐 수비체계에 대한 개편이 진행되어, 수문장 제도가 처음으로 도입 되었다.